영화를 보다 컨트롤러를 쥔 기분이 들었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를 보고 나온 게임 개발자가 공원 벤치에서 폰 하나로 21초짜리 TPS 게임 플레이 영상을 만들었다. 조회수 130만, SBS 8뉴스. 아이로믹스 류기덕 대표에게 제작 과정을 물었다.
《호프》를 보고 나온 관객은 보통 감상을 글로 적는다. 류기덕 씨는 극장을 나와 21초짜리 게임 플레이 영상을 만들었고 그 영상이 인스타그램에서 130만 회 넘게 재생됐다.
폐허가 된 시골 마을 골목에서 주인공이 몸을 굴리다 트럭 뒤로 붙고 샷건을 쏜다. 화면 가운데에 조준점이 떠 있고 왼쪽 아래에서 체력바가 깎인다. SBS 8뉴스가 이 영상을 다뤘다.
류기덕 씨는 아이로믹스 대표이고 위메이드 부사장을 지냈으며 그 전에는 십여 년을 게임 개발자로 일했는데 이번 영상은 영화를 보고 나온 일요일 오후에 아이들이 뛰노는 공원 벤치에 앉아 폰 하나로 만들었고 첫 프롬프트부터 완성까지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엔터테크 리뷰가 류기덕 씨를 만났다.
극장에서 컨트롤러를 쥔 기분이 들었다
LIM. 영화를 보다가 왜 게임 생각이 났나요?
류. 극장에서 전반부를 보는데 손에 컨트롤러를 쥔 기분이 들었습니다. 감독이 카메라를 범석, 그러니까 황정민 배우의 등 뒤에 바짝 붙여 놓는 데다 시야 밖에서 위협이 갑자기 튀어나오는데도 범석은 공포에 질린 채로 그 자리에 남거든요. 괴물한테 돌진하는 액션 히어로라기보다 겁을 먹으면서도 끝내 물러서지 않는 생활형 경찰에 가깝죠.
LIM. 영화 속 범석이 실제로 구르거나 엄폐하지는 않잖아요?
류. 안 하죠. 그런데 등 뒤에 붙는 시점, 좁은 골목, 갑자기 튀어나오는 위협. 제가 수백 시간을 부은 게임에서 쓰던 문법을 스크린 위에서 그대로 봤습니다. 이 장면이 게임이었다면 컨트롤러를 쥔 플레이어는 범석 대신 굴렀을 겁니다. 숨었다가 조준하고 반격했겠죠.
LIM. 그 감각을 글로 안 쓰고 영상으로 옮긴 이유가 있나요?
류. 어릴 때부터 영화 리뷰를 써서 PC통신에 올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긴 텍스트 리뷰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어요. 게임을 십여 년 만들다 보니 그 감각까지 극장에서 같이 살아났고요. 그래서 상상 자체를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이 영화의 전반부가 게임이었다면 이렇게 플레이됐을 것이다." 그 한 문장을 21초로 만든 겁니다.
LIM. 영화의 재현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류. 전혀 다릅니다. 영상 속 액션은 게임 개발자의 상상으로 다시 쓴 2차 창작에 가깝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때도 '《호프》 TPS 게임 데모 영상'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공원 벤치, 폰 하나, 한 시간
LIM. 작업 환경이 특이합니다. 폰 하나였다고요?
류. 영화 보고 나온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아이들이 공원에서 뛰노는 동안 벤치에 앉아서 폰을 꺼냈어요. 클로드 앱에 힉스필드 MCP를 붙여 두면 대화창 하나에서 프롬프트 설계와 이미지 업로드, 영상 생성, 결과 확인까지 다 끝나거든요. 자리를 옮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LIM. 순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요.
류. 먼저 클로드와 대화하면서 원테이크 액션 장면의 구조를 잡습니다. 그다음 외계인과 배경, 주인공 레퍼런스 이미지 세 장을 올리고 대화창에서 바로 Seedance 2.0으로 생성합니다. 결과가 어색하면 말로 지적해요. 그러면 클로드가 프롬프트를 고쳐서 다시 돌립니다.
LIM. 해상도는요?
류. 초안은 480p로 빠르게 돌렸습니다. 장면이 잡힌 뒤에만 고해상도로 다시 뽑았고요. 최종본은 두 테이크를 이어붙인 21초입니다.
뼈대는 레퍼런스 이미지 세 장
LIM. 레퍼런스 이미지 세 장이 뼈대라고 하셨는데.
류. 시작 프레임 없이 레퍼런스만으로 만들었습니다. 세 장 다 GPT Image 2로 뽑았어요.
외계인은 극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바미기르'에게서 받은 인상을 가져왔습니다. 앙상한 몸에 긴 검은 머리를 한 크리처로 다시 그렸어요. 영화 속 존재를 그대로 옮기는 대신 극장에서 받은 첫인상을 게임 보스로 다시 설계한 셈입니다. 어느 각도에서도 참고하도록 전신이 보이는 중립 포즈로 만들었습니다.

배경은 폐허가 된 1980년대 한국 시골 마을 거리입니다. 간판이랑 전신주, 상점 앞 소품까지 이미지 단계에서 다 확정했어요.

주인공은 가죽 재킷에 샷건을 든 남자의 전신 캐릭터 시트입니다.

LIM. 21초 내내 얼굴이랑 실루엣이 안 흔들리던데요.
류. 영상 프롬프트에서 세 장을 각각 지정하고 "이 이미지를 기준으로 유지하라"는 조건을 반복해서 걸었습니다. 그래서 21초 내내 캐릭터 얼굴도 외계인 실루엣도 흔들리지 않았고 마을의 시대감도 그대로 남았어요.
영화의 감각을 게임 문법으로
LIM. 영화의 감각을 게임 문법으로 옮기려면 뭘 정해야 하나요?
류.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시점을 고정합니다. 카메라가 컷 없이 주인공의 오른쪽 어깨 뒤에 붙어서 움직여요. 컨트롤러를 쥔 감각이 바로 이 시점에서 나옵니다.
둘째, 게임 UI를 넣습니다. 중앙 조준점, 왼쪽 아래 체력바, 오른쪽 아래 탄약 숫자. 이 작은 UI가 붙는 순간 보는 사람이 장면을 게임 플레이로 읽기 시작합니다.
셋째, 보스전을 설계합니다. 외계인은 가까이 오면 달려들어 할퀴고 거리가 벌어지면 자전거랑 간판을 집어 던져요. 주인공은 몸을 굴리다 엄폐물 뒤로 붙고 달리면서 샷건을 소총으로 바꿉니다. 전부 제가 머릿속에서 게임화한 전투 규칙입니다. 시간을 4초 단위로 쪼개서 구간마다 외계인의 행동과 주인공의 대응, 카메라 위치를 따로 지정했어요.
넷째, 질감을 잡습니다. 실사풍 언리얼 엔진 게임 시네마틱으로 보이게 하고 빛과 먼지, 재질감을 살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외계인이 등장할 때 건물이 무너지도록 설계한 것도 이 때문이에요. 먼지가 퍼져야 빛줄기가 공기 중에 드러나면서 장면이 무거워집니다.
숫자보다 견줄 물건
LIM. 가장 애먹은 부분은요?
류. 외계인 크기입니다. 3미터에서 4미터짜리로 잡고 벽을 부수며 등장하게 했더니 벽 구멍 크기에 맞춰 작아졌다가 나온 뒤에 다시 커지더군요. AI가 구멍을 기준으로 크기를 맞춰 버린 겁니다.
LIM. 어떻게 푸셨어요?
류. 구멍을 통과하는 대신 건물 전면을 통째로 무너뜨리며 나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환경 기준 문장을 넣었어요.
어깨는 상점 폭보다 넓다. 머리는 무너진 지붕선 위로 솟아 있다.
숫자로 쓰는 것보다 주변 사물과 견주는 쪽이 훨씬 잘 먹혔습니다. 이번 작업에서 제일 크게 배운 지점이에요. AI 영상에서는 숫자를 적어 주는 것보다 장면 안에 견줄 물건을 놓아 주는 편이 훨씬 잘 통합니다.
리뷰가 창작이 되는 자리

LIM. 조회수 130만에 공중파 뉴스까지 탔습니다.
류. 저는 숫자보다 반응의 결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댓글에 게임이 영화보다 더 재미있겠다는 말이 이어졌거든요.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사람들이 게임 문법을 그만큼 강하게 읽었다고 봅니다.
LIM. 리뷰라는 형식 자체가 바뀐다고 보시나요?
류. 영화 리뷰는 오랫동안 글의 영역이었고 우리는 극장에서 받은 것을 문장으로 옮겨 왔는데 이제는 그 감각을 문장으로 번역하는 대신 비슷한 형식으로 곧장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호프》가 게임처럼 느껴졌으니 저는 게임 영상을 만들었고 그것도 아이들이 뛰노는 공원 벤치에서 폰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오래된 취미 두 개가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만났다고 느꼈습니다. 게임을 만들던 경험과 영화를 보고 글을 쓰던 습관이 AI라는 도구 위에서 처음으로 한 덩어리가 됐어요.
LIM. 같은 시도를 해보려는 사람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류. 리뷰를 쓰던 사람이 창작을 하고 관객이 만드는 쪽으로 넘어오는 일이 앞으로 더 늘 겁니다. 이 제작기가 작은 출발점이 되면 좋겠습니다.
취재 후기: 이 작업에서 실무자가 가져갈 것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한 시간이라는 숫자에 계속 걸렸다. 이 영상을 외주로 맡겼다면 견적서에 콘티와 캐릭터 디자인, 배경, 애니메이션, 합성이 줄줄이 붙고 납기도 주 단위로 잡았을 것이다. 류기덕 씨는 공원 벤치에서 폰 하나로 그 공정을 한 번에 통과했다. 여기서 실무자가 볼 지점을 셋으로 추린다.
첫째, 같은 도구로 아무나 이 결과를 못 뽑는다. 류기덕 씨가 쓴 도구는 누구나 쓴다. 클로드도 Seedance도 GPT Image도 카드만 등록하면 열린다. 그런데 카메라를 오른쪽 어깨 뒤에 붙여야 컨트롤러 감각이 살고 조준점과 체력바를 얹어야 관객이 장면을 게임으로 읽으며 시간을 4초 단위로 쪼개야 액션이 안 무너진다는 것을 그는 프롬프트를 쓰기 전에 이미 알았다. 게임을 십여 년 만들어 본 사람이라야 안다. AI가 만드는 일을 싸게 만들수록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사람의 몫이 커진다.
둘째, 일관성 문제를 프롬프트 대신 자산으로 풀었다. AI 영상에서 캐릭터가 매 컷 바뀌는 문제는 다들 겪는다. 류기덕 씨는 시작 프레임 없이 레퍼런스 이미지 세 장을 먼저 확정하고 프롬프트마다 그 이미지를 기준으로 걸었다. 얼굴과 실루엣, 마을의 시대감을 텍스트로 매번 다시 설명하는 대신 이미지에 고정해 둔 셈이다. 캐릭터나 세계관을 반복해서 써야 하는 팀이라면 프롬프트 템플릿보다 레퍼런스 세트를 먼저 갖추는 편이 빠르다.
셋째, 숫자를 쓰지 말고 견줄 물건을 놓아라. 3미터라고 써도 AI는 벽 구멍에 맞춰 크기를 줄였다. 숫자를 안 듣는다. 대신 "어깨는 상점 폭보다 넓다"고 쓰자 통했다. 모델은 장면 안의 물체 관계를 붙잡고 절대 수치는 놓친다. 이 규칙은 크기뿐 아니라 거리와 속도, 밝기에도 그대로 쓴다. AI 영상을 다루는 팀이라면 프롬프트 가이드에 한 줄로 적어 둘 만하다.
한 가지 더 짚고 싶다. 류기덕 씨는 이 영상을 영화의 재현 대신 2차 창작이라고 불렀다. 관객으로서 받은 인상을 자기 문법으로 다시 쓴 결과라고 스스로 선을 그은 셈이다. AI 제작물의 저작권 논의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지금 만든 사람이 먼저 선을 긋고 이름을 붙여 둔 대목은 그대로 참고할 만하다.